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계 러시아인 (문단 편집) === [[중앙아시아]] 독일인 === 스탈린 시기 [[대숙청]]과 강제이주의 영향으로 독일계 러시아인(특히 볼가 독일인) 상당수가 오늘날에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역사가 있다. 당시 강제 이주 여부는 성씨와 외모 등을 보고 결정했기에 상당히 자의적이고 부당한 결정도 여럿 있었다. > 여기에 또 우크라이나와 북부 카프카스 지방에서 볼가강 연안으로 이주해 와서 살던 독일계 시민들과 그 밖의 소련 각지에 산재해 있던 독일계 시민들의 흐름이 합류했다. 독일인 혈통이라는 특징과 표정이 드러나기만 하면, 내전의 영웅이건 고참 당원이건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추방되었다.[*원주 독일계 혈통인지는 성을 보고 판별했다. 설계 기사 바실리 오코로코프(Василий Окороков)는 자기 성이 설계도에 서명하기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에서 아직 개명이 용이하던 1930년대에 로베르트 시테케르(Роберт Штеккер, Robert Schtecker)로 바꾸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그는 서명을 멋지게 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연구했다. 그런데 지금 자기의 혈통을 증명할 길이 없어 독일인으로 잡혀 들어왔다. "이건 너의 본명이지? 파시스트 첩보대한테서 어떤 임무를 받아 왔나?" [[탐보프]] 사람 카베르즈네프(Каверзнев, 모사꾼이라는 뜻)는 자기 성이 남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준다고 해서 이미 1918년에 콜베(Колбе, Kolbe)로 개명했었다. 그에게 오코로코프와 동일한 운명이 닥친 것은 언제였을까?] > 독일계 시민의 추방은 본질적으로 [[쿨라크]] 계급의 숙청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그 방법이 좀 더 온화할 뿐이었다. 그들은 더 많은 물건을 휴대할 수 있었고 유형지도 아주 불모의 땅은 아니었다. [[쿨라크]] 숙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일계 시민의 숙청에도 아무런 법적 근거는 없었다. 형벌은 형벌이고, 유형은 유형일 뿐이었다. 형법 따위와는 상관없이 몇십만 명이라도 한꺼번에 유형에 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최고 권위자의 개인적인 명령이었다. > -----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제1부 제2장[* 솔제니친의 기록에 따르면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상당히 근면하였으며, 이들의 정착지 역시 비교적 풍족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 외 [[흐루쇼프]] 시절에는 독일인 인구 상당수가 흐루쇼프의 ~~삽질~~ 처녀지 개간계획에 투입[* 중국의 [[대약진 운동]]처럼 대기근을 유발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신 상당수의 목초지를 급속도로 사막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된 적도 있다. 카자흐로 유배된 독일인들은 1970년대 들어 자치공화국을 부활시켜달라고 모스크바로 상경해 청원하기도 해서 1979년 [[소련공산당]]에서는 [[카자흐 SSR]]에 독일계 자치주를 세우는 안을 심각하게 검토했으나, 카자흐인의 폭동이 일어나 백지화된 적도 있었다. [[러시아계 카자흐스탄인|카자흐스탄 내 러시아인]] 인구와 마찬가지로 카자흐스탄 내 독일인 인구 역시 주로 카자흐스탄 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2차대전 이후에는 독일어 사용 및 교육이 금지되어 사실상 러시아어만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 독일계 러시아인 후손 상당수가 독일로 재이주한 사람들의 경우 독일어를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오늘날 독일 인구중 카자흐스탄 출신들은 [[카자흐인]]보다는 이쪽이 훨씬 많다.[* 종종 독일 내 극우파들이 카자흐스탄 독일인 이민 인구수까지 중동 출신 이민자로 카운트하여 무슬림 이민자들이 독일을 잡아먹는다 같은 프로파간다 등에 악용하기도...] 볼가 독일인들은 가톨릭 및 개신교의 여러 교파를 믿던 이들이었지만 카자흐스탄에 강제 이주된 독일인들은 소련 시절 국가 무신론 정책 + 반독감정의 여파로 오늘날에는 상당수가 무종교/무신론자인 상태이다. 일부는 러시아인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한다. 상술한대로 한 때 95만여 명에 달했던 카자흐스탄 내 독일인들은 1999년부로 35만여 명, 2020년 부로는 17만여 명 대로 계속 감소하는 상태이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전체인구의 약 1% 정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카자흐스탄 지역 전체 인구의 6~7%를 구성하던 것에 비하면 인구 비율이 많이 감소했다 하겠다. 그나마 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에서 나름 세속화가 잘 이루어지고 언론 자유도 있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편이니까 아직 일정 규모 이상의 인구가 남아있는 거고, 소련에서 독립한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경제상황/자유도 등이 카자흐스탄만 못한 관계로 독일이나 러시아 등으로 진작 빠져나간 상태라고 한다. [[키르기스스탄]] 독일인의 경우 주요 정착지인 베르그탈(Bergtal, 혹은 Rotfront), 칸트(Kant)[* [[임마누엘 칸트]]와는 관계없고, 키르기스어로 설탕을 뜻한다.], 토크모크(Tokmok)를 중심으로 소련 말기에는 10만여명에 달했으나 2009년 기준으로 9천여명으로 줄었다.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소련 말기 3~4만명 안팎이었다가 2010년경 수백명 정도 남았고, [[투르크메니스탄]]은 소련 말기 4천여명 수준이었다가 2010년경 2800명 수준.[* 참조 : 러시아어 위키피디아의 [[https://ru.wikipedia.org/wiki/%D0%9D%D0%B0%D1%81%D0%B5%D0%BB%D0%B5%D0%BD%D0%B8%D0%B5_%D0%A2%D1%83%D1%80%D0%BA%D0%BC%D0%B5%D0%BD%D0%B8%D0%B8|투르크메니스탄 인구통계 관련 문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